personal/ponderings

공부하는데 내가 가진 철학? 같은거

부엉이사장 2025. 1. 8. 23:15
Introduction
예전에는 난 뭐 프로그래밍에 프 자도 몰랐던 시절에 적었던 글인데, 자료를 뒤지다보니까 떠서 포스팅해봄ㅋㅋ
옛날부터 공부는 안하고 철학? 이런게 관심이 많았음.
그래서 보헤미안에 대해서 알게되었었따.

보헤미안과 브루주아 두가지 사상에 대해서 책을 읽었었는데, 뭐 당연히 타이틀만 봐도 서양철학이다. 이 글은 동양철학중 하나인 장자와 보헤미안을 짬뽕해서 쓴 글이었음.
한 10년전에 적은 글같은데 기억이 정확히는 안난다 ㅋㅋ

사실 지금까지 코딩을 하는데 진짜 그지같이 지냈다. 누가보기엔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거다.. 혼자서 공부하니까 애초에 사람을 안만나기도 했는데, 뭐 그냥 팩트는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관심이없다 ㅋㅋ
암튼 주말 편의점알바를 하면서 한달벌어서 생활비로 쓰고 이런 하루살이? 같은 패턴으로 살았었따.
뭐 보통사람들은 주변사람들을 많이 의식하니까.. 이런게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이런 철학에 관심있던 어린시절덕분에 약간 멘탈이 우울하지 않았던것같다. 물론 무찌랑 지내면서 너무 행복하기도 했었음. 코딩도 솔찍히 시간가는줄 모르게 재밋음 ㅋㅋ

암튼 최근에 인터넷글을 보고 알게됐는데 일론머스크가 사업을 시작할때 썰이라고 봤는데
아버지가 사업을 엄청 반대했단다. 그래서 일론머스크 스스로 딱 몇개월동안 사업하면서 최소한으로 돈을 써보자! 하고 하루 1달러로 지내보는걸 테스트해봤단다. 이렇게 지내는게 도저히 못버티겠으면 사업접자 하고 시작했단다. 하루 1달러니까 오렌지랑 빵 대용량사서 처묵처묵하면서 진행해봤는데 나름 살만해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뭐 구라도 좀 있겠지만 약간 이런 가난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보헤미아이다.

나도 사실 하루 1달러보다는 훨씬 더 쓰지만 계속 사업하고 코딩하고 집안에 처박혀 지내면서 이 보헤미안 철학이 나름 도움이 된거같음. 
그리고 생각보다 인간의 생명력은 질기고 대한민국이 복지가 좋아서 이렇게 존버타는게 나름 할만하다.(사회적으론 개암이긴할테지만.) 근데 사람들이 못버티고 도전도차 하지 않는건 하도 우리 어릴때부터 성공한인생, 패배한인생 ㅈ된인생 이런개념들을 주변에서 귀에 너무 때려박아서 인거같음..

암튼 나처럼 그지같이 바퀴벌레처럼(취업타이틀을 바퀴벌레 개발자도 생각해봤음 ㅋㅋ) 살면서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철학이 있으면 도움이 될것같아서 포스팅해본다.
그리고 내 다른 포스팅들은 전부 초딩이 쓴것같은데 ㅋㅋ 나도 맘먹으면 이런 글 쓸 수 있다는 나름 반전? 같은거 보여주고 싶기도 함 ㅋㅋㅋ

시작하면서.

    약 230년 전, 애덤스미스(경제학의 대가)는 '보이지 않는 손'(1) 의 용어를 통해 현대사회의 시장구조를 제시했다. 생산자가 소비자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움직이도록 하는 이 경제론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기본적인 사상이 담겨있음과 동시에 이러한 국가에서 시장구조가 유지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 이론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보이지 않는 손, 즉 인간의 욕심이 인간 스스로에게 간접적인 압력을 가한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의 무한함과 그에 따른 불만족의 구조는 이 개념에서 다루지 못하였고, 사회성을 갖는 동물인 인간에게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에 강요받는 '욕심'과 그 욕심의 실패에 따른 '좌절'은 현대사회에서의 크고 작은 문제로써 대두되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가시적 성과(문명발달)에 감춰진 현대인들의 심적 불안의 이면은 장자철학이 요즘 들어 주목받는 이유이다.
    장자는 개인 본인의 수양을 통해 세상사에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음을 제시한다. 필자는 개인적인 견해로써 무기 무용 무공을 '윤리적인 가치관'으로써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자는 이러한 개념을 도덕적으로 강요받는 것이 아닌 인간의 '방어체계'로써 세상을 더욱더 현명하게 보고, 다른 측면으론 '자기합리화'의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나는 자기합리화가 부정적인 측면만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의 어머니는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누가 말할 수 있는가?'(2) 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다. 심재를 통한 수양, 그로인한 좌망의 경지, 조철, 견독은 비로소 장자철학의 목표이다.

 
 

보헤미아

    장자철학을 접하며 총괄적으로 얻을 수 있는 답변은 '욕심을 버려라'였다. 욕심은 단순한 물질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무지, 무공, 무기, 무고금 등 공과 지식, 심지어 자기 자신과 시간까지 잊으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더욱더 자세하게 보면 우리에게 욕심이란 개념과 이 개념들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은 己, 시간 등 또한 인간이 흔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써 세속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판단을 하였기 때문에 언급한다.) 장자는 욕심을 버림과 동시에 독자의 인생도 더 이상 불안함과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필자는 장자철학을 접하면서 과거에 읽었던 알랭드 보통의 '불안'(3) 이라는 책이 기억났다. 이 책은 본인이 심적으로 불안했던 20살 시절에 자주 가는 대형서점에서 당시의 불안한 마음과 일치했던 책 제목에 홀리듯이 구매 했던 책이다. 이 책에서는 서양철학의 분석적이고 진단하려는 성격을 드러내며 불안에대해 설명하였는데 불안의 원인을 사랑의 결핍, 물질주의, 능력주의, 불확실성 등으로 규정짓고 이에 따른 역사적인 해결방법으로 종교, 예술, 보헤미아 철학 등을 예로 들었다. 이중 본인인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보헤미아'(4)이다.

 
    보헤미아는 세속적인 것들에 개의치 않고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들을 칭한다. 이들은 가장 최소한으로 필요로 하는 욕구만 충당시킬 뿐, 그 이상의 인간의 저장본능(초과한 욕심)을 철저히 거부한다. 이들은 브루주아(5)의 개념과 반대성향을 띈다. (브루주아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델이 되는 보헤미아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
    이는 장자철학의 '외물','무용'과 상당히 유사한 개념을 갖는다. 이 책에서는 '약 30달러로 집짓기'(6) 등 다소 현실적으로 허무맹랑한 내용들을 소개하였는데 이러한 부분은 우리 인간의 삶의 최소욕구가 사실 너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이 글에 다 적지는 못하지만 극단적 보헤미안들의 사례들이 많았다.
    필자는 상당한 불안함에 묻혀 허우적거릴 때 쯤, 이 책을 접했다. 물론 이 책에서 언급한 불안의 원인 부분이 내 불안에 담겨 있었겠지만 보헤미아 철학은 이 모든 것들을 아울렀고 본인은 부분적 보헤미안으로써 삶을 살고 있다.
    장자철학 또한 이러한 보헤미아 철학과 유사하다. 보헤미안들은 단순히 물질적인 욕망을 무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숲에서 술과 유희, 유락을 즐긴다. 책에서는 보헤미안들이 나체로 자유롭게 포도주를 마시는 그림(7)이 삽화되어있다. 그들은 가난하게 지내며 다양한 창작활동을 겸한다. 그들에게 대비해야할 미래는 너무나 가까이 있는 미래뿐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장자의 삶이 가난했지만 자유롭게 글을 쓰던 모습과 자연스럽게 일치했다. 장자철학과 보헤미아는 모두 그들이 게으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러한 철학을 가지며 사는 사람들을 게으르고 발전 없는 사람으로 따가운 시선을 보낼지 모르겠으나, 게으름과 이러한 철학들은 차이가 있다. 장자는 대붕의 우화처럼 끊임없이 시련을 극복하는 모델을 이상적으로 삼았고, 보헤미아 또한 그들은 마냥 노는 것이 아닌 창작활동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세속적인 욕심을 이상점을 향하는 길에서의 원료로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반성적인 성격을 띠지 않는다. 글의 초반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욕심은 사회에서 나에게 가지도록 강요한 욕심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장자철학을 접하며 느낀 것은 장자는 이러한 세속적인 사회를 비웃는 듯이 우화를 써내려갔지만 그는 이러한 욕심을 갖는 시발점을 비웃지는 않는다. 때문에 그는 끝없이 심재하며, 좌망의 경지로 다가갈 수 있도록 수양하는 것을 가르쳐왔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장자, 그 또한 이러한 세속적인 욕심을 가졌던 시발점을 가졌었기 때문이 아닐까?

(6) Alain De Botton, 정영목 옮김 『Status Anxiety』, 「BOHEMIA」, 은행나무, 2011, p275 28.12달러로 집짓기.

 

(7) Picnic:Nusch and Paul Eluard,Lee Miller, Man Ray, and Ady Fidelin Île Sainte-Marguerite,Cannes,France,1937. photo by Roland Penrose [see also:] via Поль Элюар -알랭드 보통 『Status Anxiet y』,에 삽화된 사진이다

 

천균

    중학교 1학년 당시, 본인은 [설득하는 글쓰기]라는 국어 수업을 학교에서 받은 경험이 있다. 이 당시에 어떤 토론주제에 대해서 개인의 생각을 주장, 설득하는 글을 쓰는 것이었는데, 대게는 이 주제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파가 나뉘었었다. 하지만 본인은 이 글 쓰기 당시 찬성과 반대하는 의견들을 서로 중용하여 중간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이 완성후 글을 제출한 나는 낮은 점수를 받았었다. 궁금한 마음에 선생님께 왜 점수가 이렇게 낮은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었는데 선생님의 대답은 “찬성과 반대중 하나를 골라야지 양측 의견을 반반씩 수용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였다. 본인은 그래도 이것은 해결책이 될 수 있고 양측이 서로 양보하면 가능한 방법이 아니냐고 반박하였으나 선생님은 끝내 내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이러한 경우는 크고 작은 사회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경우이다. 본인의 위치에서 반대파에게 조금이라도 양보하여 중용책을 제시하면 손해를 보게 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본인의 주장에서 절대 작은 부분 또한 양보하지 않으며 대립구도를 결성하는 것이 보통의 사회현상이다.
    장자는 "천예에 의해 조화시키고 만연에 맡기라." 라고 하였다. 그는 완벽한 옳고 그름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장자는 원숭이 이야기(조삼모사)와 황희와 머슴의 이야기에서 얘기하듯이 '천균', 즉 양가적 입장을 설명한다. 이는 이분법적 사고를 타파하여 상대도 옳고 나도 옳다는 장자철학의 개념인데 현대인들의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 빠진 상황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예시로써 법원의 민참여재판(8)의 경우 제 3자의 객관적인 판단을 최종판결에 참고로써 사용한다. 피의자와 피해자, 죄의 유무와 경중을 최종판단하는 법원의 역할이 최대한 객관적이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아닌가?
    배심원들과 판사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도추'의 자리에 서야한다. 때문에 배심원들은 무작위선정으로써 사회각기분야의 사람들을 초빙하는데 이는 그들에게 편견, 즉 성심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며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것 또한 혹시 모르는 편견의 역할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도추의 자리에 서있는 자에게 흑백논리주장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주장만 강요함으로써 해결책 없이 토론만 지속되거나, 누군가 더욱더 자극적으로 토론했느냐가 다수결 판단의 지시등이 되어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죽음에 대한 태도

    장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초연하다. 보통의 죽음에 초연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종교적 성격도 띄지 않았다. 철학의 무게가 그를 초연하게 만든 것일까? 장자는 죽음을 단순히 기가 흩어지고 모이는 현상으로써 설명하고, 왜 누구도 경험하지 못 한 죽음을 우리는 두려워 하고 슬퍼하는가 의문을 던진다.
    죽음은 인간에게 필사적으로(필사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우습다.), 또는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가 언젠가 마주칠 대상이며 인간의 노력으로써 변화시키는 것은 죽음과 만남의 시각밖에 없을 뿐이다. 장자의 '명'에 따른 안명론의 측면으로 보면 이것 또한 모순이다.
 
    죽음에 대한 글을 쓰기에 앞서 필자는 죽음후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설명할 이 가설을 설명하고 싶다. 본인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사실 이 가설의 시발점은 죽음과 관련이 없는 것이었고, 물리학도로써 시간에 대한 개념을 중요시 여기는 성격 때문에 수면과 시간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다소 철학적인 부분이 될 수도 있지만 본인은 최대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개념을 도입했었다.
    누구나 수면을 했을 때 아주 긴 시간을 경험했지만 현실은 짧은 시간이 흘러갔었고, 반대로 아주 짧은 시간을 꿈속에서 흘러 보냈는데 현실의 시간은 배로 흘러간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꿈을 통한 시간의 조정은 나의 눈‘(9)의 개념과 관련 있다. 만약 인간이 수동적으로 꿈의 시간을 수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면, 현실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은 제 n차 과학혁명일 것이다.
    본인은 역으로 이러한 생각에서, 혹시 우리의 현실 세계가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것이며, 그 꿈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장자의 호접몽과도 비슷한 개념을 갖는다. 또한 시간조절의 개념은 포함되지 않지만 이와 비슷한 개념은 영화 매트릭스의 '매트릭스 세계'(10)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상상으로 미루어 암아 죽음은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본인은 죽음이후의 인식이 비과학적인 이론으로써밖에 설명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지적한다. 죽음이후 상황의 모든 이론들이 누군가에겐 비현실적인 이론으로써 설명될 수밖에 없으며, 과학적인 죽음은 과학적으로 無가 됨을 주장하는 이론에 반론을 들고 싶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적으로나 비현실적으로나 죽음이후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열심히 설명한 것과는 무색하게 장자철학에서 죽음 후 사후세계가 어떠한 모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장자에게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흘러가는 사건일 뿐이다. 죽음과 그 후의 사후세계를 본능적인 두려움으로써 겁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장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치관은 불확실성이 꼭 두려움과 비극, 슬픔과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필자 또한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본인 앞에 나타날지 모르고 아직 죽음과의 만남은 먼 훗날의 상황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것일 수도 있으나, 현재로썬 죽음에 대해 장자철학에서 설명하는 태도와 유사한 태도를 갖고 있다.
    죽음과 마주칠 때, 무한한 두려움과 공포에 빠질 것인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1)처럼 환영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죽음' 그 자체가 지나간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역사에 if는 없다."

    장자는 공자와 맹자의 천명이라는 개념과 다르게 '명'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편안히 머무른다는 '안명론'이다. 이는 숙명적인, 즉 운명이 정해져있다는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장자는 피할 수 없는 '명'에 의해 고통 받지 말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권유한다. 또한 이는 단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장자철학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이는 과거와 미래, 즉 삶의 전체에서 상통하는 개념이다.
    부제목 "역사에 if는 없다."(12)는 역사학자 EH카의 발언이다. 이 발언은 역사는 이미 지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으며 이미 지난 역사에 가정을 더해 현실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지난 역사에서 배울 점을 찾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지난 과거에 대해 여러 가정을 개입시켜 한탄하는 역사학자들을 비꼬기 위한 발언이었다.
    더하여 개인의 경험으로 봤을 때, 필자 또한 이러한 경우를 많이 겪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아프게 되어서 정말 열심히 준비한 시험을 망친 일, 힘들게 모았던 돈이 하루아침 실수로 사라진 일등, 여러 좌절을 부르는 사건사고를 겪은 적이 많았고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나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없었던 일들에 대해 지속적인 고민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의 부모님의 문제, 나의 건강문제, 나의 우연히 마주쳤던 수많은 불행들 등, 많은 현재의 사건에 영향을 주는 피할 수 없던 일들. 이러한 문제들은 나를 낙담시킨 적도 많았으나 이러한 낙담에 파묻혀 지냈다면 현재의 나는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시국 또한 그렇다. 현재의 정세에 슬퍼하며, 과거에 가정을 삽입하며 아쉬워하는 국민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은 역사가 되었고 이러한 사건을 과거로 돌아가서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지나간 비극은 (신이 있다면)신을 제외한 누군가도 바꿀 수 없다.
    이미 버스는 지나갔다. 지나간 버스를 향해 욕을 하든, 발길질을 하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풀밭 위의 점심 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 오르세 미술관 직접 촬영 사진 / 화면 전경에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그려진 여성은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나 님프가 아니라 동시대 여성인 빅토린 뫼랑(Victorine Louise Meurent, 1844-1927)이라는 것을 당시 관람자들은 불편해했고, 이 여성이 옷을 잘 갖춰 입은 부르주아 남성들-이들 역시 실존 인물들을 모델로 했다-과 함께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것에서는 부르주아의 위선을 지적당하는 것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문헌 외 자료

Adam Smith 지음,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
Tr Try 지음, 『정의』, 2008
Alain De Botton 지음, 정영목 옮김 『Status Anxiety』, 은행나무, 2011
Tr Try 지음, 『Energy direction』, 2008
Keanu Reeves 감독, 『The Matrix』, 1999
Edward Hallett Carr, 역사학자, 『역사란 무엇인가』
보헤미아, 부르주아, 국민참여재판 -네이버 지식백과

'personal > pondering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바스크립트 공부 순서  (0) 2023.07.10
속도보다 꾸준함  (0) 2023.03.23